INTO THE CROATIAN MARCH, ZAGREB

디자인의, 디자인에 의한, 디자인을 위한 도시 자그레브

슬로베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자그레브로 들어오자 흑백 TV에 다시 컬러가 입혀진 듯했다. 암만 봐도 자그레브는 디자인의, 디자인에 의한, 디자인을 위한 도시다. 모노톤의 류블랴나와 달리, 이곳은 무채색의 단조로움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보인다. 캐노피 호텔 라이브러리 바에서 크루아상과 커피, 꿀과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해결하고 거리로 나섰다. 녹색의 도시 자그레브만큼 도보 여행이 즐거운 수도도 세상에 없다. 이국적인 꽃들이 만발한 예술 전시관과 고고학 박물관을 거쳐 자그레브의 심장, 반 옐라치차 광장에 이른다. 활기 넘치는 관광객과 다소 무심하게 지나치는 현지인들 사이에 서 있자니 진짜 자그레브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캅톨 언덕 위에 세워진, 자그레브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대성당을 둘러보고 돌라츠 시장으로 향한다. 싱싱한 무화과에서 크로아티아의 힘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시장과 연결되는 돌의 문을 지나니 그림처럼 예쁜 트칼치체바 거리가 나타난다. 다시 여기서 완만한 언덕을 오르니 자그레브 엽서에 자주 등장하는 성 마르카 교회로 이어진다. ‘테트리스 게임’을 연상시키는 이 사랑스러운 광장이 크로아티아의 정치 일번지라니! 정오가 되기 5분 전.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의 초조함으로 로트르슈차크 탑으로 달려간다. 이곳에서는 매일 정오에 대포를 쏘는 작은 행사가 열린다. “팡!” 대포가 터진다. 시계를 확인한다. 정확히 정오 12시. 소리는 짧지만 여운은 길다.
Canopy by Hilton Zagreb
Ul. Kneza Branimira 29, 10000, Zagreb
Tel: +385 1 4559 505
https://canopy3.hilton.com/en/hotels/croatia
자그레브를 찾는 이유가 된 실연박물관
브로큰쉽스 비스트로의 브로큰 디저트. 산산조각내 먹는 묘미가 있다.
옛 유고 시절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자그레브 도심의 파란 전차
특별한 날 특별한 선물로 주고받는 자그레브 하트
‘저는 결혼의 꿈에 들떠 이 웨딩드레스를 장만했습니다. 몇 번을 입어봤는지 모릅니다. 결혼식 사흘 전 당신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은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다시는 이 드레스를 입지 못할 겁니다.’ 올드 타운 언덕길의 실연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에는 달콤한 사랑의 기억, 그리고 고통스런 이별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연인에게 선물했다 헤어지면서 돌려받은 신발부터 눈물에 젖어 잉크 자국이 흐려진 러브 레터는 이곳에 들어온 모든 이들로 하여금 말을 잃게 만든다. 그것이 결코 타인의 흔적, 상처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아래층에 있는 ‘브로큰쉽스 비스트로(Brokenships Bistro)’에서는 ‘브로큰 디저트’를 판매한다. 종잇장처럼 얇은 디저트를 부수며 나쁜 기억을 파괴하는 의식도 치르라는 것이다. 잘못 입력된 기억들을 깨끗이 지우고 좋은 기억만을 채워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붕과 노을로 붉게 물들어가는 언덕을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정든 빨간 지붕 마을에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아쉬움 가득한 마음에 반옐라치차 광장의 상점에서 크로아티아의 지붕을 닮은 벽돌색 원피스를 구입했다. 그 원피스가 빛나는 주인공들로 채워진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 여행을 기억 속에 오래도록 소환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름다운 편린들로 9일간의 추억을 만들어준 빨간 지붕 마을이여, 안녕.
실연박물관 1층에 자리한 브로큰쉽스 비스트로
Brokenships Bistro
Katarinin trg 3, 10000, Zagreb
Tel: +385 1 2035 906
https://brokenshipsbistro.c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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