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자그레브로 들어오자 흑백 TV에 다시 컬러가 입혀진 듯했다. 암만 봐도 자그레브는 디자인의, 디자인에 의한, 디자인을 위한 도시다. 모노톤의 류블랴나와 달리, 이곳은 무채색의 단조로움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보인다. 캐노피 호텔 라이브러리 바에서 크루아상과 커피, 꿀과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해결하고 거리로 나섰다. 녹색의 도시 자그레브만큼 도보 여행이 즐거운 수도도 세상에 없다. 이국적인 꽃들이 만발한 예술 전시관과 고고학 박물관을 거쳐 자그레브의 심장, 반 옐라치차 광장에 이른다. 활기 넘치는 관광객과 다소 무심하게 지나치는 현지인들 사이에 서 있자니 진짜 자그레브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캅톨 언덕 위에 세워진, 자그레브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대성당을 둘러보고 돌라츠 시장으로 향한다. 싱싱한 무화과에서 크로아티아의 힘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시장과 연결되는 돌의 문을 지나니 그림처럼 예쁜 트칼치체바 거리가 나타난다. 다시 여기서 완만한 언덕을 오르니 자그레브 엽서에 자주 등장하는 성 마르카 교회로 이어진다. ‘테트리스 게임’을 연상시키는 이 사랑스러운 광장이 크로아티아의 정치 일번지라니! 정오가 되기 5분 전.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의 초조함으로 로트르슈차크 탑으로 달려간다. 이곳에서는 매일 정오에 대포를 쏘는 작은 행사가 열린다. “팡!” 대포가 터진다. 시계를 확인한다. 정확히 정오 12시. 소리는 짧지만 여운은 길다.